
어제는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 같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더 가까워진 우리 셋은 중간에 한동안 연락이 끊긴 적도 있었지만, 우연한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모인 우리는 어느덧 마흔을 넘겼고, 각자의 결혼생활 속에서 1년에 두세 번씩 만나 그동안 지낸 이야기를 나눈다.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복잡한지, 각자의 삶에 어떤 고민이 있는지 이야기하며 서로의 시간을 나눈다.
학생 때는 몰랐다. 서로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시간이 지나도 깊이 있는 관계로 이어지는 인연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서 오래된 친구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어제도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성숙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시간이 쌓이면 삶의 모습도 달라진다
학생 때는 우리 셋 모두 비슷한 환경에서 지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각자의 일터를 갖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삶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졌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소득이 달라지고, 남편의 경제력도 영향을 미친다. 또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는지에 따라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재산의 차이는 커진다.
누군가는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며 살아가고, 누군가는 미래를 위해 아끼고 저축하며 살아간다.
우리도 그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14년의 결혼생활을 이어왔다.
자경이는 원래부터 씀씀이가 큰 편이었다. 예쁜 것을 좋아했고, 형편에 비해 쇼핑을 즐기는 모습도 있었다.
대학생 때는 용돈이 부족했던 것인지 과비를 개인적으로 사용해 같은 과 친구들이 집까지 찾아가 돈을 받아내는 일도 있었다. 과순이로 일하던 시절에는 조교 선생님의 물건을 훔치다가 걸린 일도 있었다. 그 일로 우리와 한동안 거리를 두고 지내기도 했다.
나는 도둑질을 한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친구로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경이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문자를 보내왔고, 친구들과 한 번만 용서해 보자고 이야기하면서 다시 관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다시 잘 지냈지만, 나는 내 물건을 늘 조심해서 관리했고 돈거래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게 내가 친구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14년의 결혼생활, 서로 다른 삶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뒤 자경이는 서울로 가 시댁 2층에 살게 되었다.
나는 남편과 함께 대출을 잔뜩 끼고 아파트를 마련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대출금을 갚기 위해 아끼고 또 아끼며 살았다.
그렇게 어느덧 결혼한 지 14년이 되었다.
자경이는 여전히 시댁 2층에 살면서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쓰고 싶은 것도 쓰며 나름대로 쿨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여전히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물론 나도 아무것도 없이 사는 건 아니다. 아끼며 살아온 덕분에 작지만 내 건물도 있고, 주식도 꽤 가지고 있다. 다만 지금 당장 누리고 싶은 것보다 앞으로의 삶을 위해 저축하고 투자하는 쪽을 선택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각자의 삶의 방식이 다른 것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옷을 사라는 친구의 말
어제 만났더니 자경이가 내 옷차림을 두고 한마디 했다.
생전 옷도 사지 않고, 늘 같은 옷만 교복처럼 입고 다닌다며 옷 좀 사라고 했다.
참고로 자경이는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
친구가 운영하는 쇼핑몰에서 옷을 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내 취향과는 조금 달랐고, 가격도 선뜻 지갑을 열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친구 사이가 아무리 소중해도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억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 나갈 일이 별로 없어서 옷이 필요 없어."
그냥 그렇게 얼버무리고 술을 마셨다.
그런데 그때부터였을까.
자경이가 어디서 기분이 상했는지,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꾸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해도 꼬투리를 잡고, 사소한 이야기에도 시비를 걸었다. 술에 취해서 그러려니 이해해 보려고 했지만,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친구 사이에 술 한잔하며 농담을 주고받는 것과, 상대방의 말을 계속 비꼬고 불편하게 만드는 건 분명히 다르다.
나는 점점 기분이 상했고, 애써 참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오래된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친구끼리는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각자의 가치관이 있으니 굳이 부딪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대선 이야기가 나왔고, 자경이가 정치적인 이야기에 발끈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평소에도 정치 이야기를 할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편이었지만, 어제는 유난히 심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낯설고 불편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나 역시 친구와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제의 모습에서는 그런 여유를 느끼기 어려웠다.
이제는 정말 그만 만나고 싶다
어제의 일을 마지막으로, 이제는 자경이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참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주변에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가 부족한 사람과 억지로 어울리고 싶지는 않다.
자경이는 나와 달리 주변에 친구가 많은 편이다. 내가 한 명쯤 빠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자경이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유독 나에게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까?
오래된 친구라는 이유로 그동안 이해하려고 애썼던 것들이, 어제는 한꺼번에 피곤하게 느껴졌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기도 하고, 관계의 의미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서로의 공백을 메우며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굳이 불편한 관계를 다시 이어가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친구가 많지 않아도 괜찮다.
적어도 나를 존중해 주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지내고 싶다.
오래된 인연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속 마음을 다치면서까지 관계를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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